[뉴서울] (수필) 허 할아버님의 가르침
- 작성일07.12.26 조회수8,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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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허 할아버님을 처음 뵌 건 올해 4월이었다.
우리 클럽의 사회공헌활동의 일환으로 골프장 인근 독거노인의 실태를 파악하고 지원대상자를 찾던 중 처음 알게 된 분이다. 여든이 넘으신 할아버님은 이도 몇 개 없으시고, 귀도 잘 안 들리시고, 허리도 구부정하시지만 목소리만큼은 쩌렁쩌렁.. 늘 당당하시다. 아마 귀가 조금 어두우셔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할아버님은 우리골프장 아랫동네 파란지붕의 한옥집 문칸방에 세 들어 사신다. 할머님은 오래전 돌아가셨고, 자제는 미국에 가서 연락이 끊긴지 오래라고 하셨다. 주로 교회에서의 도움으로 생계를 꾸려 가시고, 주인집에서 반찬을 가져다 주면 홀로 방에서 식사를 손수 지어 드신다.
깡마른 체격의 할아버님은 밥이랑 김만 있으면 한 끼 거뜬히 해결할 수 있다며 웃음 지으시곤 하셨다. 나도 애써 미소 지으며 ‘아 그러세요..김, 맛있지요. 저도 좋아해요’ 라며 사안의 심각성을 애써 넘어가보기도 했다.
할아버님 댁을 처음 방문했을 때, 할아버님의 방은 내가 보아온 그 누구의 방보다도 살림살이가 깔끔하고, 흐트러짐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본적은 없지만 수녀의 방을 본다한들 이보다 깔끔할 수 있을까... 보통 생활이 어려우면 마음이 우울해지고, 그러다보면 의욕도 없어 청소도 빨래도 다 귀찮은 법인데 말이다. 그동안 방문해 본 지원 대상 가정은 대부분 그러했다. 그러나 할아버님은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올해 나는 경영혁신팀 내 사회공헌 업무를 담당하면서 많은 봉사활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불우시설방문 방문은 물론, 광주시 관내의 많은 빈곤가정과 독거노인 분들을 둘러보는 일이었다. 여러 가정 중에 유독 허 할아버님이 마음에 남는 것은 봉사라는 것이 수급자와 수혜자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에게 일깨워 주신 분이기 때문이다.
할아버님은 일제 강점기 시기에 학교를 다니셔서 일본어 실력이 뛰어나시다. 노안으로 시력이 안 좋으시련만, 독서를 누구보다 좋아하시고, 그 때문인지 말씀하시는 바도 명쾌하시다. 도움이 필요한 건 항상 정확하게 말씀해 주시고, 고마움의 표현도 표정을 곁들여 정확히 말씀해 주신다.
할아버지는 매주 화요일마다 종로에 있는 일본문화원에 가신다고 한다. 사시는 곳은 경기도 광주인데.. 매주 그곳까지 가시려면, 버스정류장까지 족히 700터는 걸어야 하고 육교를 건너 버스를 타고 성남으로 나가서는 또다시 지하철을 3번이나 갈아타야 하는 긴 여정이다. 젊은 내가 가기에서 지치는 긴 여정임에 분명하다. 일본문화원에서 매주 독서토론회에 갖는다고 하신다. 벌써 여러 해 친구들과 그 곳에서 만나 일본원서 읽고 이야기를 나둔다고 하셨다.
아쿠다가와류노스케(芥川龍之介)란 일본작가를 좋아하신다는 할아버님... 나 또한 대학에서 일문학을 전공하였으나, 아쿠다가와류노스케(芥川龍之介)의 소설은 당장에 제목을 대라 해도 한 두 권 더듬거릴 수준인데... 할아버님은 마치 교수님처럼 막힘이 없으시다. 생활이 곤곤하고 어려우시지만 그 속에서도 본인의 희망을 찾으시며 열심히 사시는 모습에 고개가 숙여지지 않을 수 없었다.
몸은 힘들지만 먼 여정의 독서토론회를 다녀오시는 길은 젊음을 충전하고 온 기분이라고 웃으며 말씀하신다. 나에게 누군가 돈을 줄 테니 매주 다니라 해도 아마 귀찮고 싫었을 먼 여정의 독서토론회 활동일 텐데...그 팔순 노인의 열정과 부지런함이 나로 하여금 오늘 이글을 쓰게 만든 것 같다. 나는 할아버지께 쌀을 사다 드리고, 방 청소 및 방충망을 달아드리고자 몇 차례 방문한 거였지만, 청소의 달인이자 일본문학의 전문가이신 할아버님은 나에게 반성과 깨달음을 주신 훌륭한 스승이시다.
자원봉사란 단순이 남에게 베푸는 게 아니라 봉사자 스스로 많은 것을 배우고 얻는 것이 더욱 크다고 혹자는 말한다. 나는 그것이 단순히 보람인줄로만 알고 있었다. 물론 활동을 하다보면 보람도 느끼고, 새로운 희망도 갖게 된다. 하지만 허 할아버님께 배우는 것은 물질의 풍요나 빈곤의 개념을 뛰어넘는 삶의 자세에 대한 깨달음인 것 같다.
올해는 11월의 첫눈을 시작으로 이곳 광주(경기도)에 눈이 많이 내렸다. 눈이 오면 할아버님의 독서토론회 가는 여정이 힘들까봐 걱정이 앞선다. 물론 그런 것 따위는 할아버님께 장애가 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좀 수월히 다니실 수 있게 올 겨울이 포근했으면 좋겠다. 다음 방문 때에는 현대소설을 별로 좋아하진 않으시지만 소설 ‘냉정과 열정사이’로 유명한 에쿠니가오리(江國香織)나 츠지히토나리(辻仁成) 같은 젊은 작가의 소설을 몇 권 준비해서 찾아뵈어야겠다.(뉴서울컨트리클럽 경영혁신팀 김정연)
(주석) 뉴서울의 나눔봉사활동 담당자가 쓴 글입니다.
연말 봉사의 의미를 다시한번 되새겨 보는 계기가 될 듯 싶어 올립니다.
우리 클럽의 사회공헌활동의 일환으로 골프장 인근 독거노인의 실태를 파악하고 지원대상자를 찾던 중 처음 알게 된 분이다. 여든이 넘으신 할아버님은 이도 몇 개 없으시고, 귀도 잘 안 들리시고, 허리도 구부정하시지만 목소리만큼은 쩌렁쩌렁.. 늘 당당하시다. 아마 귀가 조금 어두우셔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할아버님은 우리골프장 아랫동네 파란지붕의 한옥집 문칸방에 세 들어 사신다. 할머님은 오래전 돌아가셨고, 자제는 미국에 가서 연락이 끊긴지 오래라고 하셨다. 주로 교회에서의 도움으로 생계를 꾸려 가시고, 주인집에서 반찬을 가져다 주면 홀로 방에서 식사를 손수 지어 드신다.
깡마른 체격의 할아버님은 밥이랑 김만 있으면 한 끼 거뜬히 해결할 수 있다며 웃음 지으시곤 하셨다. 나도 애써 미소 지으며 ‘아 그러세요..김, 맛있지요. 저도 좋아해요’ 라며 사안의 심각성을 애써 넘어가보기도 했다.
할아버님 댁을 처음 방문했을 때, 할아버님의 방은 내가 보아온 그 누구의 방보다도 살림살이가 깔끔하고, 흐트러짐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본적은 없지만 수녀의 방을 본다한들 이보다 깔끔할 수 있을까... 보통 생활이 어려우면 마음이 우울해지고, 그러다보면 의욕도 없어 청소도 빨래도 다 귀찮은 법인데 말이다. 그동안 방문해 본 지원 대상 가정은 대부분 그러했다. 그러나 할아버님은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올해 나는 경영혁신팀 내 사회공헌 업무를 담당하면서 많은 봉사활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불우시설방문 방문은 물론, 광주시 관내의 많은 빈곤가정과 독거노인 분들을 둘러보는 일이었다. 여러 가정 중에 유독 허 할아버님이 마음에 남는 것은 봉사라는 것이 수급자와 수혜자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에게 일깨워 주신 분이기 때문이다.
할아버님은 일제 강점기 시기에 학교를 다니셔서 일본어 실력이 뛰어나시다. 노안으로 시력이 안 좋으시련만, 독서를 누구보다 좋아하시고, 그 때문인지 말씀하시는 바도 명쾌하시다. 도움이 필요한 건 항상 정확하게 말씀해 주시고, 고마움의 표현도 표정을 곁들여 정확히 말씀해 주신다.
할아버지는 매주 화요일마다 종로에 있는 일본문화원에 가신다고 한다. 사시는 곳은 경기도 광주인데.. 매주 그곳까지 가시려면, 버스정류장까지 족히 700터는 걸어야 하고 육교를 건너 버스를 타고 성남으로 나가서는 또다시 지하철을 3번이나 갈아타야 하는 긴 여정이다. 젊은 내가 가기에서 지치는 긴 여정임에 분명하다. 일본문화원에서 매주 독서토론회에 갖는다고 하신다. 벌써 여러 해 친구들과 그 곳에서 만나 일본원서 읽고 이야기를 나둔다고 하셨다.
아쿠다가와류노스케(芥川龍之介)란 일본작가를 좋아하신다는 할아버님... 나 또한 대학에서 일문학을 전공하였으나, 아쿠다가와류노스케(芥川龍之介)의 소설은 당장에 제목을 대라 해도 한 두 권 더듬거릴 수준인데... 할아버님은 마치 교수님처럼 막힘이 없으시다. 생활이 곤곤하고 어려우시지만 그 속에서도 본인의 희망을 찾으시며 열심히 사시는 모습에 고개가 숙여지지 않을 수 없었다.
몸은 힘들지만 먼 여정의 독서토론회를 다녀오시는 길은 젊음을 충전하고 온 기분이라고 웃으며 말씀하신다. 나에게 누군가 돈을 줄 테니 매주 다니라 해도 아마 귀찮고 싫었을 먼 여정의 독서토론회 활동일 텐데...그 팔순 노인의 열정과 부지런함이 나로 하여금 오늘 이글을 쓰게 만든 것 같다. 나는 할아버지께 쌀을 사다 드리고, 방 청소 및 방충망을 달아드리고자 몇 차례 방문한 거였지만, 청소의 달인이자 일본문학의 전문가이신 할아버님은 나에게 반성과 깨달음을 주신 훌륭한 스승이시다.
자원봉사란 단순이 남에게 베푸는 게 아니라 봉사자 스스로 많은 것을 배우고 얻는 것이 더욱 크다고 혹자는 말한다. 나는 그것이 단순히 보람인줄로만 알고 있었다. 물론 활동을 하다보면 보람도 느끼고, 새로운 희망도 갖게 된다. 하지만 허 할아버님께 배우는 것은 물질의 풍요나 빈곤의 개념을 뛰어넘는 삶의 자세에 대한 깨달음인 것 같다.
올해는 11월의 첫눈을 시작으로 이곳 광주(경기도)에 눈이 많이 내렸다. 눈이 오면 할아버님의 독서토론회 가는 여정이 힘들까봐 걱정이 앞선다. 물론 그런 것 따위는 할아버님께 장애가 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좀 수월히 다니실 수 있게 올 겨울이 포근했으면 좋겠다. 다음 방문 때에는 현대소설을 별로 좋아하진 않으시지만 소설 ‘냉정과 열정사이’로 유명한 에쿠니가오리(江國香織)나 츠지히토나리(辻仁成) 같은 젊은 작가의 소설을 몇 권 준비해서 찾아뵈어야겠다.(뉴서울컨트리클럽 경영혁신팀 김정연)
(주석) 뉴서울의 나눔봉사활동 담당자가 쓴 글입니다.
연말 봉사의 의미를 다시한번 되새겨 보는 계기가 될 듯 싶어 올립니다.